사회복지서비스 ?우리의 사회안정망은 안전한 것일까?
가족 사회에서 병원동행에 요양보호사에 자격증이 필요한것인가? 이젠 병원동행에도 자격증이?
25.06.06 19:53l박향선(na4am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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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우리어머니 몸을 닦고 발드레싱을 한다고 문자로 연락이 왔다. 도와달라고 말이다. 어제인가 그제깨는 문자로 기업체 후원으로 병원동행교육을 무료로 교육한다고 연락이 와서 신청을 했다.
한데 오늘 어머니에게 갔다오면서 생각을 해보니 이 사회가 어떻게 되가는 것인지 의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아플때 마다 수발을 들고 메르스때 어머니가 서울에서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슴수술을 하고 대전에 오셨을때도 내가 병수발을 다 했다.
세브란스에서 먹어본 환자식대로 음식에 소금을 별로 넣지 않은 음식을 해서 딸과 어머니와 식사을 하니 6개월 지나서는 딸도 울었다. 더 이상 못먹겠다고 ...저염식이나 다름없고 어머니가 당뇨가 있어서 올리고당등 설탕도 안넣었었다.
그날 딸을 데리고 대전 문화동홈플러스에 가서 2층에 에술리라는 뷔페에서 딸과 음식을 맛있게 먹고 왔다. 딸을 달랬다. 할머니건강해지면 설탕도 넣고 소금도 제대로 넣어서 딸아이 입맛에 맞춰주겟다고 ...딸은 그때 항상 배가 고프다고 했다. 어미니에 맞춰서 하다보니 우리 음식에는 신경도 못썼다.
그리고 어머니을 모시고 세달에 한번씩 선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등록을 하고 진료표을 받아서 담당과에 가서 진료예약을 하고 진료을 받은 후에는 돈을 냈던가 . 먼저 냈던가? 좀 복잡하다. 처음에는 진료만 받고 집으로 오다가 카드가 생기면서는 선병원에서 진료을 받은 연후에 어머니와 선병원 근처에 식당에 가서 식사을 하고 왔다.
그런데 문제는 선병원 주위에가 환자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병원식당이 병원주위식당보다 음식가격은 싸다. 하지만 환자가 입원한 가족들은 병원식당에서 식사을 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하지만 가끔씩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찾는 보호자들이 노인이나 어린이등과 함께 찾아가서 식사을 할 곳은 별로 없다. 처음에는 베트남 식당에서 샤브샤브을 국물에 먹었고 나중에는 춘천닭갈비을 먹고 나중에는 ....선병원주위에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어머니와 삥삥 돌다가 택시 타고 집으로 와서 동네 식당을 가기도 했다.
부탄에 다녀온지 얼마 안되서는 어머니가 무릎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때 나이가 60세가 넘으셨나? 골다공증 약도 드시고 정기적으로 동네 문내과에 가서 영양제나 능겔을 맞으셨다. 20여년전부터는 영양제을 맞으면 무릎에 영양을 주어서 무릎이 덜 아프다고 해서 영양제을 문내과에서 맞으면 내가 영양제을 한손에 들고 어머니와 천천히 걸어서 우리가 사는 집으로 가곤 했다.
나도 요새 무릎이 아파서 걱정이다. 2월에 병원을 가니 열린정형외과에서는 무릎관절에 중간에 무엇인가 튀어 나온 퇴행성 관절염이라 하고 지난 5월에는 물리치료을 가던 한국정형외과에서는 엑스레이을 찍더니 무릎이깨끗하다고 이야기을 했다.
아직 무릎은 아프다. 무릎이 아픈 각기병은 비타민12와 비타민 디 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남동생이 영양제을 사다주어서 어머니가 영양제을 맞는데 그전에는 돈이 부족하면 능겔에 비콤이라는 노란수액을 몇CC타서 맞곤했다.
나도 요새 영양제을 맞아야 하나 걱정이 많다. 어머니는 우리집에서 나가 살때는 막내 남동생이 밖에 나가서 밥을 사서 먹으라고 카드을 주었단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반찬을 해 주곤 했는데 가끔식 태평시장 근처 식당을 함께 가곤 했다.
그때 똥이 잘 안나오는 변비와 고혈압때문에 요거트등과 죽등을 사서 가져다 드렸다. 혼자라서 밥도 걸르실때가 있었다고 한다.덕분에 나는 홈프러스 , 딸의 친구 부모가 하는 세계료 마트, 홈마트, 동네 마트등에서 죽을 사다가 줬다.
어머니와 선병원에 같이 다닐때는 그 주위에 죽집도 없었다. 집에서 죽을 쑤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가끔씩 죽을 하나씩 사오라고 했었고 언젠가 딸아이때문에 다닌 치과주위에 유천동에 도로가에 죽집이 있어서 죽을 사기도 햇다. 그때는 그 죽이 너무나 비싸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돈을 벌면서 시간이 없으면 그때부터 인스턴트 죽을 사서 어머니에게 사서 드리다가 본죽에서 죽을 사기도 했다. 나중에는 본죽에 가서 일도 했다. 압력밥솥에 맨살이 데어서 커다랗게 물집이 생기어도 더마톱인가 큰 밴드을 부쳐가면서 돈을 벌어 딸의 과외을 대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딸이 공부을 포기하려고 해서 알바을 해서 밥은 돈으로 동네 식당을 돌아가면서 식사을 하며 기분좋게 아이을 구슬러서 과외을 받게 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큰소리로 욕을 하도 해서 질려서 식당에서 일을 안하려고 했다. 어린애들앞에서 50세가 넘어서 욕을 들어가면서 일을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식당이 주방이 원래 말이 험하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한여름에는 퇴얕볕에서 파라솔을 치고 수박을 팔았다. 집에 오면 얼굴이 화닥거려서 샤워을 하고 잠시 있다가 딸과 식사을 가고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하루종일 서서 과일바구니에 과일을 팔았다. 그러다 딸아이가 과외을 시작한다고 이야기을 해 주어서 너무 기뼈서 식당일을 다시 나간 것이 한민시장옆에 본죽이다. 한여름에 가스레인지 앞에서 죽을 쑤니 사타구니가 부르텼다. 집에 오면 속옷도 벗고 바지 가랑이을 쫙 벌리고 누웠다. 그래도 딸이 공부을 한다는 말에 너무난 기뼜다. 출근은 아홉시 반인데 보통 30분이상은 일찍 가면 물건 들어온것 냉장고에 정리을 한다. 그런데 노인분들은 아홉시 반 전부터 죽을 쑤어 달라고 본죽 문을 열고 들어온다. 보통 아홉시부터 죽을 쑤기시작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그러니 아침에는 보통 9시전부터 어쩔때는 8시 30분경에도 본죽으로 출근을 해서 죽을 쑤었다.
이 죽집에 있으면 어머니에게도 딸에게도 죽을 사서 가서 주기도 했다. 선병원에도 본죽을 차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에게는 자본금이 없었다. 딸이 몸이 안좋다보니 어느 날 아프서 학교에서 조퇴을 한다고 전화가 와서 사장 아들에게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 하고 바쁜시간지나서 죽에 사용할 밥을 해 놓고 집에 왔다가딸에게 죽을 먹이고 다시 본죽 가게로 갔다.
그 다음날 잘리었다. 아침에 줄근하자 마자 앉으라고 해서 이야기을 들으니 아들이 밥솥에 팔을 데이었단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을 듣고서 죽을 쑤는데 죽이 잘 안쑤어져서 호박죽을 두번이나 태워서 안되겠다 싶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고 탄 호박죽을 싸가지고 집으로 왔었다. 한데 여사장은 내가 팔이 밥솥에 데여서 커다란 물집에 밴드을 붙이고 일한 것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한 달은 갔다. 그 본죽 앞에 약국에서 급해서 내돈주고 밴드을 사가지고 붙이고 백다방 커피을 마시며 일을 하는 기분.. 죽에 사용하는 밥을 압력밥솥에 내가 다 해 놓고 잠시 집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밥을 푸기만 하면 되었었고 ...그곳은 작은 가게라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8시까지 쉬는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무척 피곤하다. 잠시 오후에 3시경에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손님이 오면 쉬지도 못한다.식당 마감은 매뉴얼대로는 7시부터 주방 정리에 들어가서 7시 40분경되면 거의 마무리 되고 사장 아들이 가게에 있을때는 사장 아들은 일찍 들어가라고 한다.
병원동행을 어머니와 딸을 데리고 수시로 다녀서 인지 죽이나 어린이가 먹는 음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딸이 중학교1학년때 딸이 심장이 안좋다고 하고 답답하다고 해서 성모병원에 갔다. 심장에 대한 검사을 받는데 한 번에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서 받고 결과는 괜찮다는 것이고 운동을 해야한다고 했다. 친구가 농협카드을 만들라고 해서 그 농협카드로 심장검사을 했었다. 검사가 끝나고 나면 그 병원에 그냥 식당이 아니라 프렌차이즈인 듯한 식당에서 딸에게 돈까스을 사주고 했다. 딸은 너무나 행복해 했다. 병원에 또 오자고 말이다.
대전성모병원에도 환자들이 먹을 현대식 음식을 파는 곳은 거의 없다. 병원동행이나 요양보호사나 산후조리사나 다 요세는 교육을 받고 증이 있어야 일을 할 수가 있고 정부로 부터 돈도 나온다.
나는 이중에 하나도 증이 없으니 우리 어머니도 나에게는 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가 여동셍과 살기 얼마전에 처음으로 내가 사회복지학 사이버 강좌을 들었으면 한다고 하니 돈을 오십만원을 주셔서 등록을 햇다. 한데 딸이 난리가 났다. 아이 패드 아니면 공부을 안하겟다고 해서 사회복지학 등록했던 것을 찾아서 돈을 받고 삼성카드로을긁어서 아이패드을 샀다. 그리고 아이패드용 팬슬도 가격이 이십만원 가까이 된다.
지난 2월에 딸 아이 앞으로 돈이 나온 것이 있어서 물었다. 산후조리사 과정을 들으려면 20만원이 필요한데 도와줄수 있냐고 화을 내면서 안된다고 한다.
어머니는 메르스때 가슴수술하고 병수발을 다 했더니 나중에 어머니가 괜찮아지고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동생들이 나에게 힘이 들게 했다.
우리가 이집에서 나가겟다고 수도 없이 이야기 하고 집을 보러 다닐때는 안된다고 하시고 나중에 너희는 이집에 있고 내가 나간다고 나중에 혼자 나가셨다. 그때 남동생앞으로 돈이 많이 들어와서 어머니가 정부보조금을 못받게 되었었다. 동사무소에서는 공문이 왔는데 어머니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야기을 안해 주어서 ...
오늘 느닷없이 여동생이 이야기 하길 이젠 집이 팔려서 이사가야 한다고 이야기을 해서 ,,난 임대 아파트는 안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 왔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때 어머니가 껀득만하면 이사가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불안했다.
내 남동생과 조카들을 법원에 고소해서 우리 생활비라도 집세라도 받아 낼까 생각을 하고 어머니에게 무라고 하면 그냥 참으라고 했다.
내가 남동생 아이들을 보지 않고 서울에 계속있거나 외국으로 나가 캐리어을 쌓앗으면 그 돈이 얼마인가? 요양보호사도 아버지 돌아가셧을때 하고 싶어서 오거리에 요양보호사 학원을 찾아갔는데 시간과 돈이 없어서 못했다. 어머니도 아신다. 그때 어머니가 다락에 내가 요양보호사 공부하던 책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을 하셨다.
언젠가 어머니집에 온 요양보호사는 자가용을 끌고 어머니와 선병원에을 갔었던 것 같다. 잠깐 서대전사거리에 기독교연합봉사관에 청소년사회복지협회에서 알바을 하는데 그 곳에서 일하는 청소년 사회복지사가 이야기 햇다. 사회복지사을 하려면 컴퓨터도 잘하고 운전도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데 다른 일에 비해서 임금이 많지가 않고 고달프다고 ...
27년전에 서울에서 자원봉사 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서울 YMCA인가 YWCA에서는 영국에서는 장애인들의 활동을 돕는 자원봉사자을 먹고 재워주고 하는 사회보장 서비스가 있다고 .한국인들 중에는 이정보로 영국에 가서 어학연수을 받기도 한다고 ..
병원동행교육과 증이 있어야지 노인환자나 어린이들 돌볼 수 있는 것인가.?생활지원사라는 것도 있어서 하루 교육을 받으면 노인들 상대로 생활을 돌보고 한달에 150여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가족은 무엇일까? 우리세대는 부모님을 공양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나는 누가 돌봐주나?
지난 달에 보험회사에서 교육을 받는데 개인연금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나는 그전에 개인연금기금이 유용한 곳에서 자금이 운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육과 패션, 농업에 투자 했으면 한다고 국민은행에 제안을 했는데....요새는 많은 생각이 든다.
내가 나이가 들어 나을 데리고 병원에 가 줄 사람이 있을까?돈이 없는데...딸은 이야기 했다. 십년만 기다리라고 ...자기가 공부하고 직업을 갖고 ..안정이 될때 까지 말이다. 나는 일어나야 한다.
병원에 같이 동행할 사람이 없더라도 ....